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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월드리포트] 이탈리아 위기의 씨앗, 드라기가 뿌렸나

서혜진 기자

파이낸셜뉴스

입력 2018.06.01 17:36

수정 2018.06.01 17:52

서 혜 진 국제부 기자
서 혜 진 국제부 기자

"무슨 수를 써서라도(Whatever it takes) 유로화를 지키겠다."

2012년 유로존 부채위기가 극에 달했을 당시 유럽중앙은행(ECB) 총재로 취임한 마리오 드라기는 이 말 한마디로 시장 분위기를 급반전시켰다. 이후 마이너스 금리와 양적완화(QE) 등 비전통적 통화정책을 쏟아내며 유로존을 벼랑 끝에서 구해낸 해결사로 찬사를 받았다. 올해 안에 QE 프로그램을 종료하고, 내년 중반 기준금리를 올리는 통화정책 정상화 계획을 그리던 그가 이번주엔 돌연 '이탈리아 위기의 씨앗을 뿌린 인물'이라는 비난의 대상이 됐다. 그 이유가 뭘까.

이번주 이탈리아발 글로벌 금융위기에 대한 우려가 금융시장을 뒤흔들면서 일각에선 이탈리아 정정불안의 화살을 드라기 총리에게 돌렸다.

그가 유로존 부채위기 당시 재정적 어려움을 겪던 이탈리아에 가혹한 긴축정책과 경제개혁을 요구한게 이탈리아 위기의 불씨가 됐다는 것이다.
그 같은 처방이 이탈리아 경제성장을 도리어 악화시켜 이탈리아 포퓰리즘(인기영합주의) 정당들이 득세하는 빌미를 줬다는 게 이들의 주장이다.

2011년 8월 당시 ECB 총재 후보자였던 드라기는 장 클로드 트리셰 당시 ECB 총재와 함께 경제개혁 목록을 담은 비밀서한을 작성해 이탈리아 정부에 보냈다. 이들이 요구한 개혁목록 중 많은 부분이 법제화됐는데 여기에는 은퇴연령 상향과 노인연금수당 변경 등이 담겼다.

그러나 그 이후 이탈리아 경제상황이 악화되자 오성운동과 동맹당 같은 극우 포퓰리즘 정당들이 득세할 기회를 포착하게 됐다는 주장이 나온다. 기본소득 도입과 세금 인하 등 재정지출 확대 정책을 표방한 오성운동은 지난 3월 이탈리아 총선에서 승리한 뒤 동맹당과 공동정부 구성에 전격 합의하며 서유럽 최초의 포퓰리즘 정부를 예고했다.

이들 포퓰리즘 정당들이 민심을 파고들 수 있었던 건 그만큼 이탈리아 경제상황이 좋지 않기 때문이다. 2007년 5.7%를 기록했던 실업률은 2014년 13%대로 치솟았다가 현재는 11% 선에 머물고 있다. 국가부채는 국내총생산(GDP)의 132% 수준으로 EU 회원국 중 그리스 다음으로 많다. 경제성장은 지난해 1.5%로 유로존 평균(2.5%)을 크게 하회한다. 유로존 부채 위기의 진원지였던 스페인과 포르투갈이 각각 3.1%, 2.7%의 경제성장률을 기록하고 있는 것과 대조된다.

드라기 총재의 양적완화를 통한 시장개입이 이탈리아 개혁을 지연시켰다는 지적도 나온다. 2조5500억유로 규모의 양적완화 프로그램을 실시해 시장을 안정시켰지만 이탈리아 정부에는 숨 돌릴 틈을 줘 실질적 개혁을 하지 않아도 된다고 오판하게 만들었다는 것이다.

이탈리아 싱크탱크 브루노레오니의 알베르토 밍가르디 소장은 "드라기가 포퓰리스트들이 성공하는 조건을 만들었다"고 주장했다. "무슨 수를 써서라도 유로화를 지키겠다"는 드라기의 선언이 이들 포퓰리즘 정당들엔 "우리가 원하는 건 뭐든 다 할 수 있다"는 의미로 해석된다는 것이다. 그는 "(이탈리아 포퓰리즘 정당들이) 제안한 모든 것들 역시 ECB가 가까운 장래에 비전통적 통화정책을 억제하지 않을 것이란 가정에 입각한 것"이라고 강조했다.

그러나 그간 이탈리아 정치 상황을 보면 드라기 총재에게 비난의 화살을 돌리는 건 부당해 보인다. 2011년 유로존 부채 위기 이후 몬티, 엔리코 레타, 마테오 렌치, 파올로 젠틸로니 등 4명의 총리가 권좌를 오르내렸다. 평균 재임기간은 19개월에 그쳤다.

드라기 총재와 함께 긴축재정과 경제개혁을 밀어붙였던 몬티 총리는 16개월 만에 사임했다.
부패 스캔들 및 재정 위기를 초래한 책임을 지고 물러났던 베를루스코니 전 총리가 정계에 복귀해 그를 흔들었기 때문이다. 이렇다 보니 연속성 있는 개혁을 추진하는 게 불가능했다.


이번 드라기 총재의 해결책보다 이탈리아 새 내각이 내놓을 정책에 더 관심이 쏠린다. sjmary@fnnews.com sjmary@fnnews.com 서혜진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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