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구순의 느린 걸음]

보편요금제로 또 면피하면 안된다

파이낸셜뉴스 입력 :2018.05.15 17:04 수정 : 2018.05.15 19:15

"공적 자원인 주파수를 활용하는 이동통신 서비스가 공정한 가격에 제공돼야 한다." 과학기술정보통신부가 월 2만원대 요금에 데이터 1GB, 음성통화 200분을 제공하는 이동통신 보편요금제를 밀어붙이면서 내놓은 명분이다. 정부가 2년마다 이동통신 요금을 직접 결정하겠다는 강제조항도 만들었다.

월 2만원대 이동통신 요금은 공정할까. 2만원대도 턱없이 비싸니 월 1만원대는 돼야 한다고 요구하는 국민은 없을까.

상품 가격이라는 게 누군가 일방적으로 정하면 공정하기 쉽지 않다.
그래서 수요와 공급, 기업 간 경쟁을 통해 가격이 결정되도록 하는 게 시장경제다. 그런데 정부가 직접 공정한 가격을 정하겠다니 정부가 시장보다 공정할 자신이 있는 걸까.

이동통신 요금이 싸다, 비싸다를 놓고 10년 넘도록 논란이 끊이지 않는다. 논란의 시작점에는 늘 이동통신 3사가 시장을 나눠 먹으면서 요금경쟁을 하지 않는다는 비판이 있다.

사실 이동통신 시장에 원래 3개 사업자만 있었던 것은 아니다. 애초 5개 사업자가 경쟁을 시작했는데 정부가 '통신 3강' 정책을 짰다. 우리나라 규모에는 3개 사업자가 적절하다고 정부가 정했다. 그러고는 5개 사업자가 3개로 줄어들도록 인수합병(M&A)을 추진했다. 그러면서 3위 사업자가 시장에 자리를 잡을 때까지 1등 사업자가 요금을 내리지 못하도록 요금을 감시했다. 3위 사업자가 어느 정도 성장한 뒤 요금인가제를 없애 요금경쟁을 일으켜야 한다는 전문가들의 지적이 있었지만 정부는 타이밍을 놓쳤다. 엄마가 젖 뗄 시기가 지나도 계속 젖을 먹여주니 아이는 밥 먹는 법을 배우지 않았다.

통신산업이 금융, 유통 같은 다른 산업과 융합하는 추세가 나타날 무렵 전문가들은 규제정비를 요구했다. 통신사들이 통신사업 의존도를 낮출 수 있도록 규제를 풀어 자연스럽게 통신요금 인하를 유도해야 한다는 조언이었다. 그러나 정부는 통신산업 규제의 끈을 놓지 않았다. 한국의 통신3사는 죽으나 사나 통신요금 수입으로 연명해야 하는 방안퉁수가 됐다.

결국 통신요금 논란의 밑바닥에는 적절한 시기에 정책을 손보지 않은 정책실패가 자리잡고 있는 셈이다. 그런데도 정부는 보편요금제라는 강제 요금정책으로 통신산업 전반의 정책실패를 덮으려 하는 것 아닌가 스스로 따져봤으면 한다.

정책이 잘못돼 폐렴을 앓고 있는 한국 통신산업을 보편요금제라는 기침약 한 알로 치료한 것처럼 포장하면 안 된다.

대통령이 세 번 바뀌는 동안 매번 통신요금 인하에 발목 잡혀 미래지향적 정책은 손댈 엄두도 못 냈던 게 우리 정보통신기술(ICT) 정책부처의 현실 아닌가. 그렇다면 이번에는 근본대책을 내놔야 하는 것 아닌가. 보편요금제 입법으로 왈가왈부할 것이 아니라 시장경쟁을 활성화하고, 스스로 요금이 내릴 수 있는 구조를 짜야 하는 것 아닌가. 지금 과기정통부가 보편요금제로 면피하려 들면 다음 대선 때 통신요금 인하 공약은 다시 후배 공무원들의 발목을 잡지 않겠는가.

cafe9@fnnews.com 이구순 디지털뉴스부장·부국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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