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설·칼럼 이구순의 느린걸음

[이구순의 느린 걸음] "블록체인 신호등 좀 켜주세요"

이구순 기자

파이낸셜뉴스

입력 2018.04.03 17:30

수정 2018.04.03 17:30

[이구순의 느린 걸음] "블록체인 신호등 좀 켜주세요"

초등학교 입학 직후 버스로 다섯 정거장이나 떨어진 학교로 전학을 했는데, 첫날 난감한 일이 생겼다. 횡단보도를 건널 때 초록불이면 건너고, 빨간불이면 서라는 교육을 익히 받았으니 배운 대로 하면 됐다. 그런데 차들이 제법 다니는데도 신호등이 없는 건널목을 만났다. 건너야 하는지, 기다려야 하는지 몰라 한참을 서 있다가 결국 지각을 했다. 집에 돌아와 신호등 없는 건널목은 어찌 건너야 되는 거냐고 물었더니 한참 고민하던 아빠는 "눈치껏 할 수밖에 없다"며 "눈치보게 해 미안하다"고 하셨다.

블록체인, 가상화폐공개(ICO) 이슈가 워낙 뜨거워 관련 기업들에 인터뷰를 요청하는 일이 종종 있다.
돌아오는 대답은 하나같이 "정책 분위기를 지켜본 뒤 하자"다. 정부의 정책방향을 확인할 수 없는데 괜히 언론에 사업계획을 떠벌렸다 미운털이라도 박히는 게 걱정이라고 한다.

정부가 고민을 길게 하고 있다. 지난해 9월 ICO를 전면금지하겠다는 방침을 내놓은 뒤 6개월째 실제 가상화폐 발행을 금지하는 법 조항이나 가이드라인을 못 낸다. 법률적으로는 ICO가 불법이 아닌 셈이니 법률 전문가들의 조언은 천차만별이다. 법이 정비되기 전에 후딱 ICO를 지르라거나, 괜히 정부에 밉보이는 짓 하지 말라거나…. 가상화폐 거래소는 올 1월 법무부와 청와대가 거래소 폐쇄에 대한 엇갈린 구두 정책을 내놓은 뒤로 묵묵부답이다. 기존 거래소들은 그저 '튀지 않으려' 숨죽이고 있다.

정부가 고민하며 시간을 보내고 있는 사이 세계시장에서 블록체인, 가상화폐, ICO산업은 급성장하고 있다. 돈이 몰리니 해외에서는 서너 단계 앞선 블록체인 기술이 개발되기도 하고, 인재들도 속속 나오고 있다.

정부가 고민하며 시간을 보내고 있는 동안 우리 기업들은 기술도, 시장도, 인재도 놓치며 정부의 블록체인 신호등 켜지기만 기다리고 있는 셈이다.

이러다 해외 선진국에 비해 우리나라의 블록체인 기술이 몇 년 뒤처졌다거나, 뒤진 기술을 발전시키기 위해 예산을 얼마 투입하겠다고 설명하는 정부의 공식 보도자료를 보게 되지 않을까 걱정이다.

ICO로 자금을 끌어모은 뒤 투자자들에게 손해를 떠넘기는 사례가 생기면 사기죄로 처벌하면 되지 않을까. 거래소가 기술투자에 소홀해 투자자에게 손해를 안겼다면 정보통신망법으로 처벌할 수 있는 것 아닌가. 그렇다면 굳이 길게 고민할 일 없는 것 아닌가. 이미 정부는 블록체인 산업과 기술을 발전시키겠다는 공식 입장을 수차례 확인했으니 말이다.


건널목에 미처 신호등을 설치하지 못했다고 행인들더러 길 건너지 말고 서 있으라 할 수는 없는 것 아닌가.

가장 무서운 정책은 규제가 아니라 묵묵부답이다.

어릴 적에는 아빠가 왜 미안하다 하셨는지 이해하지 못했다.
지금 블록체인 산업을 보면 정부가 미안해해야 할 것 같다.

cafe9@fnnews.com

fnSurvey