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회 사회일반

"미투했다가 벌금 나왔어요"..피해자 옥죄는 명예훼손죄

구자윤 기자

파이낸셜뉴스

입력 2018.02.25 13:15

수정 2018.02.25 13:15

피해자, 고소 감수해야 해 위축
최근 성폭력 피해를 폭로하는 미투 운동이 확산되면서 사실 적시에 의한 명예훼손죄를 폐지해야 한다는 목소리가 높아지고 있다. 현행법상 사실 적시만 해도 처벌 받을 수 있어 많은 여성들이 부담을 느끼고 있다는 것이다. (사진제공=한국YWCA연합회)
최근 성폭력 피해를 폭로하는 미투 운동이 확산되면서 사실 적시에 의한 명예훼손죄를 폐지해야 한다는 목소리가 높아지고 있다. 현행법상 사실 적시만 해도 처벌 받을 수 있어 많은 여성들이 부담을 느끼고 있다는 것이다. (사진제공=한국YWCA연합회)

"도와주세요. 성희롱성 발언을 들은 뒤 그 사실을 알린 대가로 명예훼손 고소를 당하고 벌금 70만원 처분을 받았습니다. 저는 정식재판을 신청했고 여러분들의 도움이 필요합니다"
최근 김모씨는 소셜네트워크서비스(SNS)에 이 같은 글을 올렸다.
성희롱 사실을 폭로했더니 명예훼손죄 혐의로 고소 당하고 벌금을 내야 하는 상황에 처했다는 것이다. 많은 여성들이 미투(MeToo·나도 당했다) 운동에 동참하는 데 망설이는 이유이기도 하다.

■"그저 사실만 올렸을 뿐인데.. "
김씨는 지난 2015년 11월 앱을 통해 서울 여의도에서 식사 친목 모임을 만드는 과정에서 A씨를 1대 1로 만나게 됐다. A씨는 초면인 김씨에게 외박 여부를 묻고 밤늦게 끝나는 영화를 보자며 차가 끊기면 본인 집에서 자고 가라는 등의 발언을 했다고 전했다.

25일 김씨에 따르면 A씨에게 성희롱을 당했다고 생각해 A씨가 결제한 밥값의 절반인 2만원 가량을 입금한 뒤 A씨를 모임에서 쫓아내자 A씨는 앱 대화방에서 “더치페이라고 해놓고 강퇴하고 차단하냐. 입금도 안 하냐”고 따졌다는 것이다. 김씨는 밥값을 이체한 내역서를 올린 뒤 자신과 같은 피해자가 없으면 하는 바람에 이같은 사연을 한 온라인 커뮤니티에 올리면서 인터넷 곳곳에 퍼졌다.

A씨는 2년여가 지난 뒤 자신에 대해 쓴 허위내용을 수정하지 않으면 고소하겠다는 문자를 김씨에게 보낸 뒤 실제 명예훼손 혐의로 경찰에 고소했다. 김씨는 거짓말탐지기 조사까지 받은 끝에 자신이 적은 글 내용이 사실이라는 것이 밝혀졌으나 법원은 벌금 70만원의 약식명령을 했다고 설명했다. 현행법상 사실을 적시했더라도 명예훼손죄로 처벌할 수 있기 때문이다. 김씨는 정식 재판을 청구하고 법원에 출석할 예정이다.

김씨는 "여성들이 그동안 은폐됐던 피해 사실을 연이어 밝히고 있지만 미투 운동이 어려운 게 현실"이라며 "피해자가 사실을 밝히기만 해도 명예훼손죄가 적용되기 때문에 (자신도) 가해자라는 이름을 뒤집어쓰고 위축됐다"고 털어놨다.

■정치권, 사실 적시 명예훼손죄 폐지 움직임
미투 운동 바람이 불면서 사실 적시에 의한 명예훼손죄를 폐지해야 한다는 목소리가 곳곳에서 나오고 있다. 청와대 국민청원 게시판에도 관련 청원이 올라와 2만5000명 이상이 동의했다. 미투 운동을 촉발한 서지현 검사는 "명예훼손으로 고소를 당할 경우 사실 적시 명예훼손죄에 대해 위헌법률심판 소송을 해서 다퉈볼 생각"이라고 밝힌 바 있다.

그동안 잠잠하던 정치권도 꿈틀거리고 있다. 금태섭 더불어민주당 의원은 사실 적시 명예훼손죄를 폐지하는 형법 개정안을 2016년 9월 대표발의했으나 국회에서 계류됐다. 더불어민주당 젠더폭력TF는 이달 6일 간담회를 열고 성폭력의 피해 사실 공개시 사실 적시에 따른 명예훼손을 폐지하는 방안을 추진하기로 했다.

미국, 프랑스 등 상당수 선진국은 사실일 경우 명예훼손죄를 인정하지 않는다. 표현의 자유를 억압하고 정치적으로 악용될 소지가 있다는 취지다.
유엔 자유권규약위원회가 2015년 한국에 관련 규정 폐지를 권고해 정부는 내년까지 의견서를 제출할 예정이다.

한국여성아동인권센터 안지희 변호사는 "우리나라는 외국보다 명예훼손 처벌 범위가 넓은 편이어서 병원에서 부당한 대우를 받았다고 글만 써도 명예훼손죄로 고소당하는 등 표현의 자유가 위축되고 있다"며 "현행법상 공익성이 인정되면 명예훼손죄로 형사처벌이 불가능하지만 공익성 기준도 검사·판사가 판단하기 나름"이라고 지적했다.
그는 "현재 미투 운동의 경우 명예훼손죄로 고소당할 것을 감수해야 하는 만큼 쉽지 않은 상황이어서 이에 대한 논의가 필요하다”고 덧붙였다.

solidkjy@fnnews.com 구자윤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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