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의나루]

토니 블레어와 문재인

파이낸셜뉴스 입력 :2018.02.13 17:25 수정 : 2018.02.13 17:25


토니 블레어가 이끄는 영국의 노동당은 1997년 총선에서 압승을 거두면서 거의 20여년에 걸친 보수당과 대처리즘의 지배에 종식을 고했다. 그러나 블레어는 자만하지 않았다. 그동안 백안시하던 국민들이 총선을 통해 노동당에 기대하는 바람직한 정치와 정책이 무엇인지를 잘 간파했다. 우선 당의 명칭부터 '신노동(New Labour)'당으로 바꿨다.
아울러 그때까지 국회의원 공천권의 3분의 1을 장악했던 노동조합의 권력을 축소하고, '1인1표' 원칙에 따라 투표권을 부여했다. 당을 노동자의 당이 아닌 새로운 대중정당으로 바꾸겠다는 의지였다.

집권 후 그는 경제사회 전반에 대한 대대적 개혁에 착수하면서 '제3의 길'을 표방했다. 신자유주의식 시장자본주의가 불평등 확대라는 시장실패를 가져왔다면 사민주의식 '복지국가'는 소득재분배 차원에서만 평등을 추구해 복지국가의 위기를 유발했으며, 정부 개입으로 모든 문제를 해결하려는 것으로부터 벗어나지 못했다고 비판했다. 노동.복지 정책에 있어서 평등(분배와 보장)과 효율(경쟁과 책임) 간의 균형과 조화를 중요시했다. 복지에서는 개인의 기여와 책임을 강조했고, 관대한 실업급여 대신 재취업 가능성을 높이기 위한 직업훈련에 투자했다.

연대적이고 포용적 사회에 대한 믿음, 불평등 해소 및 사회적 약자 보호 등 표방하고 추구하는 정치와 정책의 지향점에 있어서 일견 문재인정부는 토니 블레어의 '제3의 길'과 맥을 같이하는 것처럼 보인다. 그러나 그런 정치적 지향과 가치를 실현하는 데 동원되는 정책수단과 접근방식에서는 상당한 차이를 보이고 있다. 무엇보다 현 정부의 노동정책은 노동권 강화와 함께 노동시장을 더욱 통제되고 규제된 시장으로 이끌어 가고자 한다. 시장에서 자율적으로 결정돼야 할 임금, 근로시간에 관한 강력한 규제 그리고 노사 자율에 맡겨야 할 단체협상 등에 있어서 과거 어느 정부보다 적극적이고 과감한 개입이 그것이다.

그러나 "규제된 노동시장은 이미 안정된 일자리에 취업해 있는 사람들(대기업, 공공부문, 정규직 근로자들)은 보호하지만, 내부자 대 외부자로 대치되는 이중노동시장을 만들어서 외부에 있는 사람들(즉 청년구직자, 중소기업, 비정규직 근로자들)이 1차 내부노동시장에 일자리를 얻는 것을 대단히 힘들게 만든다." 제3의 길의 이념적 후견인인 앤서니 기든스가 '노동의 미래'에서 지적한 말이다. 딱 우리나라 노동시장 상황이다. 그는 이어서 "이런 (이중)노동시장은 기업혁신과 기술적 변화에 따른 적응을 방해하는 경향이 있다"고 했다. 지금처럼 제조업 2.0 수준도 벗어나지 못하고 있는 경직되고 낡은 노사관계, 조직화된 10%의 기득권과 이기심만 더욱 강화하는 노동정책과 OECD 최하위 노동생산성 가지고는 최근 발표된 대통령 직속 4차산업혁명위원회의 장밋빛 청사진은 그냥 또 하나의 희망고문으로 끝나게 될 가능성이 높다.

16세기 정치학자 마키아벨리는 '군주론'에서 '정치인은 신념이 아니라 업적으로 평가받는다'고 했다. 영국 역사가 에릭 홉스바움은 블레어를 "바지를 입은 대처"라고 비판했지만 그가 이끄는 신노동당은 이후 선거에서 3연속(1997년, 2001년, 2005년) 승리했다. 문재인 대통령은 연두 기자회견 서두에 "취임 후 가장 먼저 한 일이 일자리 상황판 설치"라며 일자리정책을 강조했지만, 통계청이 같은 날 발표한 '2017년 연간 고용동향'에 따르면 지난해 청년실업률은 9.9%, 전체 실업자 수는 약 103만명에 달해 동일한 통계를 작성하기 시작한 2000년 이후 최고치를 기록했다.

올겨울 추위보다 더 매서운 불황과 고용한파가 계속되고 있는데 무엇을 어떻게 해야 하는가. 최저임금 인상, 근로시간 단축을 통한 소득주도 성장이 더 많은 일자리를 가지고 돌아올 때까지 정부를 믿고 그냥 기다려야 하는가.

방하남 국민대학교 석좌교수·전 고용노동부 장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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