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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fn 스포트라이트 토익이 뭐길래] 커지는 ‘토익 무용론’…"900점 받아도 외국인 앞에선 말문이 턱"

김유아 기자

파이낸셜뉴스

입력 2017.11.29 16:58

수정 2017.11.29 22:36

(3)토익실력 키워서 어디에 쓰나요
취직.승진에만 필요한 시험.. 문법.독해 등 공식만 치중
실제 회화는 따로 공부해야.. 승진평가서 빼자는 논의도
지난 12일 오전 10시께 토익(TOEIC) 시험이 치러지는 서울 신림중학교 교실 안. '시험지 파본을 검사하라'는 음성이 나오자 자리를 꽉 채운 수험생 24명은 문제를 풀었다. 한 여성은 손톱으로 시험지를 꾹꾹 눌러 흔적을 남겼고 20대로 보이는 남성은 연필로 답을 찍어냈다. 시험감독관이 "파본 검사만 하세요"라고 외치자 수험생들은 눈동자를 굴려 답을 복기했다. 60초가량의 파본 검사 동안 900점 달성을 위한 갖은 전략이 펼쳐진다. 이날 시험을 본 김모씨(26)는 "자투리시간에 문법 10문제 정도 풀었다"며 "이번에 900점 넘으면 토익 공부를 더 이상 하고 싶지 않다"고 말했다.

한 어학원에서 수험생들이 토익 공부를 하고 있다.<div id='ad_body2' class='ad_center'></div> 사진=fnDB
한 어학원에서 수험생들이 토익 공부를 하고 있다. 사진=fnDB

취업준비생, 직장인에게 토익 900점이란 취업과 승진 등 목표를 이루기 위한 중요한 '도구'다. 20년 전에도 그랬다. 모 신문 1999년 9월 13일자 '취업형 인간으로 단련 중' 기사에는 '대기업들은 대개 토익 800점을 원서접수 기준으로 삼고 있다. 합격을 보장받으려면 900점을 너끈히 넘어야 한다. (중략) 토익만을 위한 기술을 따로익혀야 한다'고 나와 있다. 시대는 변했지만 '먹고사는 문제'에서 토익 고득점을 빼놓고 이야기할 수는 없는 셈이다.

본지는 토익 수험생들을 만나 토익 점수가 아닌 '토익 공부' 자체에 대해 의견을 물었다. 토익 900점으로 대기업에 취업하고 대학도 졸업할 수 있었지만 이들은 토익 공부에 불신을 드러냈다. 토익을 아무리 잘해도 외국인 앞에서 꿀 먹은 벙어리가 되고, 다시 돈을 들여 회화공부를 해야 하기 때문이다. 많은 시간과 돈을 들인 수험생 사이에서 토익 무용론이 나오는 까닭이다.

올해 공공기관에 입사한 조모씨(29)는 공대 출신으로 토익 935점을 받아 서류평가에서 큰 가점이 됐다고 전했다. 그는 토익 점수를 따기 위해 돈과 시간을 쏟았지만 스스로 영어실력은 형편없다고 털어놓는다. 조씨는 "1년이란 시간과 200만원가량 돈을 들여 토익 스킬만 많이 배운 것 같다"며 "최근 외국인과 이야기하는데 간단한 길 안내조차 듣기가 안돼 당황했다"고 설명했다. 그는 "토익 공부할 때 동사가 나오면 뒤에 명사가 나온다는 등 공식을 외워 점수를 높였지만 실생활에서는 전혀 도움이 안됐다"며 "영어 실력을 늘리기 위해 최근 미드(미국 드라마)를 보고 있다"고 덧붙였다.

대학원생 박민식씨(28)는 토익을 영어실력이라고 생각하지 않는다. 그는 과거 대학졸업 기준을 만족하기 위해 토익 800점을 받았다. 박씨는 "토익을 잘한다는 게 영어를 유창하게 할 수 있다는 것보다는 '공부 열심히 했네' 정도의 느낌"이라며 "토익 공부할 때 문법, 독해 등을 공부했으나 대학원을 다니고 일을 하면서 이 공부가 도움이 된 적이 없다"고 말했다. 이어 "만약 취업할 때 기업에서 토익 점수를 요구하지 않는다면 토익 공부를 할 생각은 없다"고 전했다.

승진을 위해 토익을 공부하는 직장인도 불만이 이어진다. 대기업 인사팀에서 일하는 이모씨(33)는 토익 점수가 800점대이지만 사내에서 '미스터 리'라고 불린다. 회사 안에서 발생하는 모든 영어 업무를 처리하기 때문이다. 이씨는 "외국인으로부터 걸려온 간단한 전화조차 누구도 응대하지 못해 '미스터 리 어디 있느냐'고 기다린다"며 "신입사원 대부분 토익이 900점을 넘고, 승진하려면 토익 점수가 필수이지만 영어 보고서 작성은 물론, 한 마디도 못하는 경우도 많다"고 지적했다. 이씨는 "직장 안에서도 토익이 쓸모가 없다는 불만이 쏟아져 지난해부터 승진평가에서 빼자는 논의도 있다"고 밝혔다. 토익 940점을 보유한 직장인 심모씨(28)도 "토익은 비즈니스 영어를 추구하지만 실제 일을 하다 보면 별로 연계되는 게 없는 것 같다"고 말했다.
그는 "회사에서 승진하려면 일정한 토익 점수가 필요하지만 대개 토익과 별개로 회화공부를 한다"며 "점수로 사람을 평가하는 것 외에 토익이 어떤 데 쓰이는지 아직 모르겠다"고 전했다.

최근까지 토익 시험을 치른 취업준비생 노영상씨(26)는 토익을 '국군 도수체조'에 비유한다.
노씨는 "전공 수업은 평소에 쓰이지 않지만 정말 필요한 순간이 있고, 배운 걸 다행으로 여길 때가 있는데 토익을 공부하고도 실생활에서 유용하게 쓴 적은 한 번도 없었다"며 "토익은 공부하기에는 귀찮고, 하고 나면 어떤 의미인지 몰라 마치 국군 도수체조를 하는 느낌"이라고 말했다.

스포트라이트팀 박인옥 팀장 박준형 구자윤 김규태 최용준 김유아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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