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fn논단]

개혁 공신의 권력욕

파이낸셜뉴스 입력 :2017.10.09 16:17 수정 : 2017.10.09 16:17


"금번의 좌리공신(佐理功臣)은 무슨 공이 있습니까? 태평한 시대에 공을 논하는 것은 마땅치 않습니다." 성종2년 3월 27일자 '성종실록'의 기록이다. 이날 왕은 신숙주, 한명회, 정현조 등에게 좌리공신이라는 호칭을 부여하자 사헌부 지평 김수손, 사간원 헌납 유문통이 왕 앞에서 대놓고 반대한 것이다. 그러나 왕은 이를 묵살하고 공신들에게 말, 토지, 노비 등을 하사했다.


세조의 뒤를 이은 예종이 재위 13개월 만에 열아홉의 나이로 급서하자 세조의 비 정희왕후가 너무 어린 예종의 장자나 병약한 세조의 장손 대신에 세조의 둘째손자를 왕(성종)으로 지명한 것이다. 성종은 장자, 장손은 아니었지만 왕위 계승권을 가진 왕족으로 적법한 절차를 거쳐 왕위에 올랐다. 물론 예종도 성종도 모두 한명회의 사위였기에 한명회 등의 힘이 왕권 창출에 작용했을 것이다.

공신(功臣)은 혁명이나 국난 시 국가에 특별한 공이 있을 때 부여된다. 조선 초기의 공신들은 나라를 새롭게 세우려 했던 혁신가였다. 태조 이성계와 새 왕조를 창업하는 혁명에 참여하고 이어 벌어진 왕자의 난, 세조의 왕위 찬탈까지 개국 초기 정치적 혼란기에 국가의 기틀을 다지는 일에 큰 공을 세운 인물들이다. 정도전, 신숙주, 정인지 등과 같이 개혁공신들은 고려 귀족과 승려 등 기득권층의 전횡과 낡고 무능한 정부 체제를 일신하고 유교의 민본사상에 입각한 강한 국가를 건설해 세종 이후 문화의 꽃을 피우는 데 큰 역할을 했다.

공신에게는 각종 특전이 주어졌다. 공신에게는 공신전과 이를 경작할 노비 등이 급부됐다. 예컨대 개국공신 1등의 경우 150결에서 220결의 토지와 15명에서 30명에 이르는 노비가 주어졌다. 뿐만 아니라 자식이 공직에 진출할 수 있는 음서 등 각종 특권도 부여됐다.

그런데 세월이 지나며 공신이 남발되었다. 공신의 녹훈이 태조에서 성종대까지 무려 8차례나 이루어졌고 공신의 수도 너무 많았다. 조선왕조의 개국공신에 태종 이방원의 즉위를 도운 좌명공신, 세조의 찬탈에 기여한 좌익공신, 성종의 즉위를 도운 좌리공신이 있으며 그 밖에도 1차 왕자의 난의 정사공신, 계유정란의 정난공신, 이시애난 평정에 기여한 적기공신, 남이의 옥사를 평정한 익대공신 등이다. 매번 1~4등급에 100명 이내의 공신이 지명되었으며 추종자들에게 준 원종공신도 매번 1000명을 넘었다. 게다가 특정 가문은 대를 이어가며 독식했다. 성종 2년에 책봉된 좌리공신을 보면 한명회는 그의 아들 한보, 사촌인 한계미, 한계희, 한계순과 한계미의 아들 한의 등 6명이 공신록을 받았다. 신숙주도 그의 아들 신정, 신준과 함께, 정인지도 아들 정현조, 정승조와 같이 공신에 책봉되었다. 뿐만 아니라 한명회는 정난, 좌익, 익대, 좌리 공신의 4공신에 모두 1등으로 봉해졌고, 신숙주와 정인지도 4공신에 모두 책봉돼 권력을 마음껏 향유하게 되었다.

공신은 나라를 세우고 국가의 기틀을 새롭게 한 혁신가다. 그러나 권력욕에 물들면서 그들만의 기득권이 되었다. 대의를 위해 혁신하던 개혁공신이 어느덧 시대의 걸림돌이 된 것이다. 이것이 후세, 구체제를 옹호한 정몽주는 추앙받는 반면 개혁의 공이 큰 정도전, 신숙주, 정인지는 변절자로 폄하받게 만드는 단초가 되었다.

이호철 한국IR협의회 회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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