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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차장칼럼] 그래도 지켜야 할 원칙

최갑천 기자

파이낸셜뉴스

입력 2017.09.26 17:06

수정 2017.09.26 17:06

[차장칼럼] 그래도 지켜야 할 원칙

얼마 전 모처럼 감명받은 영화를 만났다. 2차 세계대전 당시 오키나와 전투에서 무기 없이 75명의 부상병을 구한 미군 의무병 데즈먼드 T 도스의 실화를 다룬 '핵소고지'다. 극장 개봉 당시 주저하다 못봤던 아쉬움을 몇 달 뒤에야 주문형 영화(VOD)로 해소했다.

기대했던 대로 영화는 명작이었다. 밤새 사선을 누비며 '주여, 단 한 명만 더 구하게 해주소서'라는 기도와 함께 꺼져가는 생명들을 구하는 의무병의 투철한 신념과 전우애는 눈물겨웠다. 그런데, 도스가 구한 75명의 군인 중에는 적인 일본군도 여러 명 포함됐다.
대체 '죽이지 않으면 죽는' 전장에서 적을 구할 수 있는 행동의 근원은 어디서 오는 건지 한참 생각에 잠겼다. 제네바협약에 따라 비무장, 중립, 불가침의 책임이 있는 의무병의 사명이자 양심에 따른 행동일 것이다. 그것은 아무리 전쟁터라도 생명존중의 절대가치를 훼손하지 않겠다는 숭고한 정신이다. 그것이 지금까지 전 세계가 나름의 국제질서를 지키고 평화를 유지하는 근본일 게다.

그런데 최근 한·중 관계를 보면 이런 상식과 규범은 도통 통하지 않는 형국이다. 사드(고고도미사일방어체계) 보복이 어느덧 일년이 됐다. 지난해 이맘때 우리 정부가 사드 배치를 결정하자 중국 정부는 한국 기업들에 분풀이를 했다. 그것도 공식적 채널을 피해 소방점검 등의 교묘한 수법으로 말이다. 대표적인 사드 보복 업종에는 배터리가 있다. 지난 8일 국내 전기차 배터리 3사 대표들은 백운규 산업통상자원부 장관과의 간담회에서 중국의 전기차 보조금 차별정책을 정부가 나서 도와주길 간곡히 호소했다. 중국을 의식해 그동안 쉬쉬하던 민간 기업인들이 오죽하면 이 문제를 공론화했을까 싶다. 다행인지 수수방관하던 정부는 간담회 며칠 뒤에 "국제규범 위반 소지가 있는 조치들에 대해서는 중국에 대한 국제무역기구(WTO) 제소 등 통상법적 대응도 적극 검토하겠다"며 강경한 입장을 보였다. 하지만 이튿날 청와대는 "북핵 문제 해결을 위해 중국과의 공조가 중요한 시점"이라며 산업부의 입장을 하루 만에 손바닥 뒤집듯 번복했다. 사실상 북핵 문제 해결 전까지는 WTO 제소를 비롯한 사드 보복 대응을 최소화하겠다는 가이드라인을 선언한 셈이다. 정경분리는 국가 간 통상관계에서 불문율로 여기는 초월적 약속이다. 나라끼리 정치적, 외교적으로 다투더라도 경제적 협력관계까지 깨는 것은 금기다.
그것이 국제사회의 경제질서가 지금까지 유지되고 발전된 원천이다. 그런데 우리 정부 스스로가 정경분리의 원칙을 깬 중국에 미온적 대응을 대놓고 선언한 건 양국 통상관계의 비대칭성을 드러낸 격이다.
앞으로 한국 정부의 입장을 등에 업고 중국이 전기차 배터리 차별 등 사드 보복 수위를 또 얼마나 높일지 두렵다.

cgapc@fnnews.com 최갑천 산업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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