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설·칼럼

[구본영 칼럼] 사드 너머 '팍스 시니카'의 그림자

구본영 기자

파이낸셜뉴스

입력 2017.09.20 16:55

수정 2017.09.20 16:55

사드 핑계 中 산업재편 전략.. 이중고로 한국 기업들 휘청
자구책 찾되 당당히 맞설 때
[구본영 칼럼] 사드 너머 '팍스 시니카'의 그림자

중국에 진출한 우리 기업들이 뿌리째 흔들리고 있다. 사드(고고도미사일방어체계) 보복이라는 찬바람을 맞으면서다. 신세계 이마트는 진작에 철수 결정을 내렸다. 롯데마트도 투자한 3조원을 날리고 매각 의사를 밝혔다.

남은 한국 기업들도 시련의 계절을 맞았다. 현대차 합작법인인 베이징현대는 혐한 정서와 함께 판매량이 반토막났다.
부품업체 교체 요구 등 중국 측의 '갑질'에 지난달 말 공장 가동이 일시 중단됐다. 경쟁력 있는 한국 온라인게임 업체들도 만리장성에 꽉 막혔다. 중국 정부가 판호(중국 내 게임유통권) 발급을 이유 없이 미루면서다.

국제경제 전문가들은 이구동성으로 말한다. 중국은 지금 자국산업 중심의 신소비정책을 펴고 있고, 사드는 이를 위한 빌미일 뿐이라고. 기술경쟁력이 있는 업종부터 내수 대체를 시작해 한국에 대한 무역수지 적자를 해소하는 기회로 삼겠다는 게 진짜 속내라는 추론이다. 그렇다면 한.중 간 분업구도에 적신호가 켜졌다고 봐야 하겠다.

이는 한국이 자본과 중간재를 제공하고 중국이 싼 노임으로 완제품을 생산하는 협업 공식의 시효가 끝나가고 있다는 뜻이다. 수입대체산업 육성은 세계시장 후발주자들의 흔한 전략이다. 다만 중국은 이 과정에서 재산권이나 국제 상도의를 아무렇지도 않게 무시한다는 게 문제다. 한국 기업들에 대한 치졸한 사드 보복을 보라. 시장경제 원리는 고사하고 대국다운 풍모조차 찾기 어렵다. 반도체 등 몇몇 분야를 제외하곤 중국으로선 아쉬울 게 없다고 보는 건가. 롯데 등 유통기업이 사드를 핑계 삼은 자산흡수 전략의 일차 과녁이 된 듯하다. 이제 기술을 거의 흡수한 터라 자국 부품업체를 키워주지 않은 현대차도 슬슬 미워지는 모양이다.

유럽을 석권했던 나폴레옹 1세가 일찍이 경고했다. "잠자는 사자 중국을 깨우지 마라. 세계가 흔들린다"라고. 아편전쟁 전까지만 해도 중국은 늘 세계 총생산의 20% 이상을 차지했다. 세계는 그런 중화(中華) 제국이 다시 기지개를 켜는 모습을 보고 있다. 사드보복 너머로 어른대는 '팍스 시니카'(중국의 세계지배)의 짙은 음영을 지켜봐야 한다는 게 우리의 불운인지도 모르겠다.

올해는 한.중 수교 25주년이 되는 해다. 돌아보면 오랜 역사에서 우리가 중국보다 확실히 더 풍요로웠던 때는 1960~80년 개발연대를 거친 최근 수십년간이다. 대륙보다 산업화.정보화에 앞섰다는 자존감이 가득했던 '좋은 시절'(벨에포크)이 자칫 달콤한 일장춘몽인 양 끝나서는 안 될 말이다.

통상보복을 뛰어넘을 최상의 지렛대는 기술혁신이다. 설령 우리가 사드보다 더 센 방어무기를 배치하더라도 중국은 뼈(기술)를 취하기 위해 살(시장)은 내줄 게다. 다만 '올인'은 늘 위험한 도박이다. 우리는 수출도, 투자도 중국에만 너무 깊이 발을 들여놓은 듯싶다. 중국과의 전략적 동반자 관계를 포기할 순 없지만 동남아 진출이든, 인도로 가는 길이든 대안도 찾아야 한다.

자구 노력보다 더 중요한 건 당당한 자세다.
중국 없이도 '한강의 기적'을 일군 우리다. 성주골프장 앞에서 일부 여당 의원들이 '사드 반대 댄스'까지 추며 비위를 맞췄지만 중국이 어디 태도를 바꿨던가. 무도한 사드보복이 계속되면 세계무역기구(WTO) 제소 등 정공법 대응을 주저할 이유도 없다.
그 정도 결기조차 없으면 나라를 지킬 수 없음은 반만년 한.중 관계사에 낱낱이 기록돼 있다.

kby777@fnnews.com 구본영 논설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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