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설·칼럼

[구본영 칼럼] 北 고슴도치론과 베를린 구상

구본영 기자

파이낸셜뉴스

입력 2017.07.12 17:14

수정 2017.07.12 17:14

핵 한 방으로 체제 지키며 南보다 美와 거래하려 해.. 분단고착 막을 B플랜 절실
[구본영 칼럼] 北 고슴도치론과 베를린 구상

국제정치에 '고슴도치 이론'이란 게 있다. 약소국의 생존술을 분석하는 논리다. 공격하는 강대국들이 기대하는 이득보다 더 큰 손실을 줄 능력만 갖추면 약소국도 살아남을 수 있다는 것이다. 고슴도치가 몸을 웅크린 채 가시로 맹수의 공격을 막듯이….

북한 김일성 주석이 생전에 이 이론을 배웠을 리는 없다. 다만 그는 '고슴도치가 몸을 말아 가시뭉치로 변하면 호랑이도 어쩔 수 없다'는 말을 자주 했단다. 탈북자들의 증언이다.
북한 세습정권이 왜 3대를 이어 핵무장에 매달리는지를 짐작게 하는 비유다. 호랑이를 '미국'으로, 고슴도치 가시를 '핵.미사일'로 치환했을 때다.

문재인정부 출범 이후에도 북한이 미사일 도발을 거듭하고 있다. 지난 4일 미 본토에 도달 가능하다는 대륙간탄도미사일(ICBM)급을 쏘아 올렸다. 5~6월 수차례 중거리 탄도미사일을 시험하더니 결국 국제사회가 암묵적으로 설정한 레드라인에 다가섰다.

문 대통령은 지난 6일 독일 쾨르버재단에서 '베를린 구상'을 밝혔다. 북핵 제재에 동참은 하지만 남북 당국 간 평화적 해법 모색도 병행하겠다는 메시지였다. 정상회담을 포함한 대화 재개 등 4가지 제안도 했다. 한반도 평화를 다룰 "운전대를 잡겠다"는 의지였다. 한데 북한이 동승할 조짐이 없다. 문 대통령의 평창올림픽 단일팀 제안에 "한 귀로 듣고 한 귀로 흘려버렸다"(장웅 북한 IOC 위원)고 배짱을 튕기는 판이니….

심지어 북한은 새 정부의 잇단 대화 제안에 "우리가 핵 안 내려 놓을 것쯤은 알고 덤벼라"(노동신문)고 어깃장이다. 핵 담판은 하더라도 미국과 할 테니 '남조선은 빠지라'는 식이다. 군사력에서 북한이 우위였던 1960년대 김일성은 "남조선은 미국과 일본이라는 두 갓끈에 의지하는 갓"이라고 폄하했다. 갓끈만 잘라버리면 갓이 날아가듯 미국만 떼 내면 힘없는 남한을 상대로 적화통일이 가능하다는 논리였다.

남북 간 국력차가 현격히 역전된 지금도 김정은이 조부의 '갓끈 망상'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있는 건가. 그의 머릿속에 남북 대화는 없고 미국과의 핵 담판뿐인 것 같다. 물론 그도 여태까지의 남북 합의 중 '6.15 공동선언'과 '10.4 합의' 이행에는 예외적으로 집착하고 있다. 하지만 이는 남한이 북한에 핵을 포기해야 한다는 토를 달지 않고 대규모 경제지원을 한다는 '약속 어음'을 끊어줬기 때문일 것이다.

문재인정부가 남북 대화를 기조로 비핵화 설계도를 내비쳤다. 대화의 입구에서 북핵 동결을 전제로 한.미 연합훈련을 축소하고, 출구에선 한반도 평화협정을 체결해 북핵 폐기를 견인한다는 복안이다. 그러나 북한은 이 선의를 받아들일 기미조차 없다. 사실 문 대통령이 베를린 구상에서 제시한 '북한 체제 보장'과 '북한 비핵화'는 상충되는 과제다. 핵으로 유일독재체제를 지키겠다는 김정은이 남한이 '당근'을 끼워 건넨다고 해서 비핵화 카드를 덥석 물 개연성은 작다는 얘기다.

그렇다면 남북 당국 채널이란 기회의 창을 닫을 필요는 없지만, 올인 할 이유도 없다. 기어코 핵을 손에 쥐려는 김정은의 시간을 벌게 해줘 '분단 고착화'라는 재앙을 부르지 않으려면? 북한 주민들에게 바깥세상 정보를 더 많이 공급해 북한 사회를 밑에서부터 변화시킬 'B플랜'도 가동해야 한다.
예컨대 시간이 걸리더라도 개성공단 확장보다 북한 노동자를 불러들여 휴전선 남쪽에 공단을 만드는 게 낫다. '햇볕' 그 자체가 아니라 방향이 문제다.
핵 야욕을 못 버리는 북한 지도부에만 쪼여 정작 응달 속 북한 주민들의 고통이 무한정 길어지게 해선 안 된다.

kby777@fnnews.com 구본영 논설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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