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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떻게 생각하십니까?] 누구는 원하고, 누구는 힘들어 하는 '건배사'

파이낸셜뉴스

입력 2016.01.24 16:50

수정 2016.01.24 16:50

"엄청난 스트레스" "분위기 반전·단합 도구" 건배사 앱·학원까지 등장
회식 참여한 전원이 한마디씩 하는 문화로 변해
시키는 입장에선 '긍정적'.. 아랫 사람은 부담감 커
센스 있는 건배사, 술자리 건배사, 멋진 건배사, 연초 건배사, 신년 건배사…. 한 유명 포털사이트에 건배사를 치면 따라붙는 연관 검색어만 20개다. 최대 허용 개수다. 사람들이 가장 많이 검색하는 단어 중 하나라는 의미다.

건배사 애플리케이션(앱), 책 등도 속속 출시되고 있다. 단합과 화끈한 분위기, 건강기원 등 분야별로 정리까지 돼있다. 소수지만 스피치 학원에서 건배사를 수강하는 이들도 생겼다.
주로 모임에서 직급이 가장 높은 사람이 단합의 의미로 해온 건배사는 이제 회식에 참여하는 전원이 차례로 돌아가면서 한마디씩 하는 문화로 바뀌고 있다.

바야흐로 회식의 필수로 자리잡은 건배사 문화, 사람들은 어떻게 생각하고 있을까. 속사정을 들어봤다.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누구는 원하고, 누구는 힘들어 하는 '건배사'

■건배사가 힘든 청춘들

"이멤버, 리멤버!" 순간 정모씨(30)는 '멘붕'에 빠졌다. 며칠 전부터 준비했던 건배사인데 바로 앞 차례인 동료가 해버렸기 때문이다. 순간 머릿속이 하얘지고 초점이 흐려졌다. 아무 생각할 겨를도 없이 바로 차례가 돌아왔다. "아…저…" 머뭇거리다가 눈에 들어온 건 소주 이름. "처음처럼!" 용기를 내 외쳤지만 군데군데서 "식상하다" "우~" 하는 비난이 나왔다. 정씨는 바로 건배사 애플리케이션(앱)을 내려받았지만 차례는 다시 오지 않았다. 그렇게 정씨는 '재미없는 애'로 낙인 찍혔다.

아부형 건배사도 또래들 사이에서는 꼴불견이다. "올 한 해도 부장님 덕분에 행복합니다(딸랑)." 카드사에 다니는 최모씨(30대)는 아부형 건배사의 달인으로 통한다. "동료들이 눈치를 주지만 어쩌겠어요. 웃기게 하면 품위 없다고 혼나고. 인터넷에서 찾아서 하면 식상하다고 혼나고. 이게 회식인지 눈치게임인지, 제 차례가 돌아올까봐 잔 든 손만 부들부들 떨었었죠. 그래서 잡은 콘셉트가 아부예요. 평균은 하더라고요."

■어색함 극복 등 순기능(?)도

반면 건배사를 '시키는' 위치에 있는 '높은 분'들은 건배사를 적극 추천한다. 순간의 어색함을 풀고 자리의 단합을 더욱 공고히 할 수 있다는 것이다. 대기업 김모 상무(50)는 무조건 돌아가며 건배사를 시킨다. "회식 자리에서는 부서장 눈치를 보는지 다들 말이 없어요. 분위기를 반전시키는 가장 쉬운 방법이 건배사죠. 건배사를 통해서 직원들의 애로·건의사항을 간접적으로 알 수 있어 저는 좋은데요."

평소 자주 보지 못하는 직원들을 파악할 수 있다는 목소리도 있다.

유통기업 이모 부장(42)은 "직원들이 건배사 하는 걸 보면 어느 정도 외향적인 성격인지 파악이 가능해요. 말을 잘하는 친구가 건배사도 잘하고 업무 발표도 잘하죠. 또 평소에 잘 모르던 직원들이 무슨 생각을 하는지 알 수 있어 한층 친해지는 기분입니다. 건배사로 조금이나마 존재감을 어필할 수 있죠."

이들 대부분은 단합 도구로 건배사만 한 게 없다는 의견이다.

중소기업 박모 사장(53)은 "보통 회식이나 모임에는 이유가 있는데, 왜 모였는지를 상기시켜 줄 수 있습니다. 가령 프로젝트가 성공적으로 마무리된 것을 축하하기 위해 모였으면 '이번에 잘했으니 다음에도 잘하자!' 정도의 건배사는 할 수 있는 것 아닌가요?"

■"전형적인 한국의 체면문화"

누구는 원하고 누구는 힘들어하는 건배사, 그렇다면 하고 싶은 사람만 하면 안될까.

안타깝게도(?) 건배사를 시키는 사람들은 이에 대해 부정적이다. 한 고위급 공무원은 "건배사는 조직문화의 산물"이라면서 "조직에서는 누구는 하고 누구는 안하는 게 더 어색하다"고 말했다.


연세대학교 심리학과 김영훈 교수는 건배사를 동양 특유의 '체면문화'로 분석한다. 김 교수는 "동양은 서양에 비해 '남이 자기를 어떻게 생각할까'에 훨씬 예민하다"면서 "특히 위계질서가 강한 경우 남의 시선을 의식하는 문화가 더욱 강하게 자리잡는다"고 설명했다.


그는 "윗사람은 지위에 맞는 체면과 위엄을 지켜야 하는 부담이 있고, 아랫 사람은 윗사람에 대한 체면과 도리 때문에 부담이 강하다"면서 "특히 아랫 사람들은 건배사를 머뭇거리는 경우 많은 체면을 한번에 잃어버린다고 생각하기 때문에 엄청난 부담이 될 수 있다"고 말했다.

psy@fnnews.com 박소연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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