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화 문화일반

[창간 15주년/대한민국 명장열전] (15) 뉴욕 '메트로폴리탄 오페라의 디바' 소프라노 홍혜경

파이낸셜뉴스

입력 2015.10.11 17:36

수정 2015.10.11 21:17

"오랫동안 노래하려면 발성·마음·똑똑함을 갖춰야죠"
데뷔초부터 거절해 온 '나비부인' 초초상 역을 맡았다니..
동양 여자 역할로 세상에 나오고 싶지 않았다, 캐스팅하는 사람들에게 편견이 생길 거라 생각했지, 그런데 지금 안하면 영영 안 할거같아 내년 2월 무대에 오른다.
당신을 꿈꾸는 어린 소프라노들이 많은데 조언을 해준다면..
자기 음성을 가장 먼저 파악하라고 말해주고 싶다. 테크닉을 제대로 터득하지 않고 세계 정상급 성악가들의 영상을 보며 따라하는 건 목소리를 망치는 지름길이다.
홍혜경은 성악가들에게는 '꿈의 무대'로 불리는 뉴욕 메트로폴리탄 오페라 무대에 350회 이상 오른 '디바 중의 디바'다. 전세계 오페라 무대를 누볐던 그는 이제 국내 무대와 후학 양성에 좀 더 많은 시간을 할애할 생각이다. 사진= 박범준 기자
홍혜경은 성악가들에게는 '꿈의 무대'로 불리는 뉴욕 메트로폴리탄 오페라 무대에 350회 이상 오른 '디바 중의 디바'다. 전세계 오페라 무대를 누볐던 그는 이제 국내 무대와 후학 양성에 좀 더 많은 시간을 할애할 생각이다. 사진= 박범준 기자


안되는 게 많아서 '아티스트 노(No)'. 소프라노 홍혜경(56)의 별명이다. 목에 조금이라도 무리가 갈 수 있는 활동은 모두 피한다.
인터뷰는 물론이고 배역 고르기도 까다롭다. 음역대와 캐릭터가 자신과 딱 맞아야 선택한다. 전 세계적으로 가장 많이 공연되고 있는 오페라인 '라 트라비아타'의 비올레타 역을 마흔 일곱이 돼서야 처음 맡은 것도 이 때문이었다. 성악가들에게 '꿈의 무대'로 불리는 뉴욕 메트로폴리탄 오페라(이하 메트)에서 31년째 '디바'로 350번이 넘는 무대에 올랐다. 세계 정상의 성악가들과 매 시즌 주역으로 무대에 선다는 것은 아시아 출신 성악가로서는 매우 드문 경우다. 국내에서는 조수미, 신영옥과 함께 세계적인 소프라노 '빅 3'로 불린다. 순서를 따지자면 홍혜경이 가장 먼저 세계 무대에 데뷔했고 활동 영역을 따지자면 세계 무대에서 그의 커리어는 독보적이다. 한국에서는 그를 자주 만날 수 없었던 이유다. 그런 그가 최근 2년간 여러 차례 내한해 한국 관객들의 눈과 귀를 황홀하게 만들고 있다.

지난 5일 서울 광화문의 한 식당에서 만난 홍혜경은 "요즘 너무 자주 오는 것 같아서 좀 죄송스럽기도 해요. 아무리 맛있는 음식도 자꾸 먹으면 지겹잖아요"라며 호쾌하게 웃었다. 170㎝의 훤칠한 키, 뚜렷한 이목구비에 꼭 어울리는 웃음이었다.

"외국에서 큰 성공을 하는 것도 좋지만 우리나라, 한국 관객들과 만나는 자리에 의미가 더 크다고 생각해요. 직접 와서 음악을 '드린다'는 건 정말 감사한 일이죠."

지난해부터 연세대 성악과 석좌교수로 학생들을 가르치게 되면서 관객과도 자주 만나게 됐다. 먼 길을 왔는데 '천상 가수'에게 무대를 오래 쉬는 것만큼 좀이 쑤시는 일은 없다. "학생들을 가르치면서 연주도 하고 얼마나 좋아요. 다만 나이가 드니까 모든 게 쉽지는 않아요. 시차 적응도 힘들고. 평생 스물한살일 줄 알았는데 말이에요."

홍혜경이 처음 오페라 무대에 선 나이가 그 즈음이었다. 1984년 메트 데뷔작인 '티토왕의 자비'도 잊을 수 없는 무대지만 줄리아드 음대 시절 오페라 무대를 처음 밟았던 순간은 평생 잊을 수 없다. 고작 3페이지짜리 조역이었지만 학생 신분으로 프로 무대에 오른 파격적인 캐스팅이었다. 작품은 베르디의 '오르페오'. 현존하는 최고(最古)의 오페라로 바로크 시대의 오페라를 엿볼 수 있어 음악사적으로도 의미가 깊다. 한국에서는 최근에야 초연된 이 작품이 홍혜경에게는 첫 오페라 무대였다.

―어떻게 캐스팅 됐나.

▲아메리칸 오페라센터에서 줄리아드 음대 대학원생들 중에서 프로가 되기 전에 오페라 무대에 캐스팅하는 경우가 종종 있었다. 대학생인 경우 코러스만 주는데 조역으로 발탁됐다. 하데스의 아내인 프로세피나. 지옥의 여왕이었다.

―처음으로 오페라 무대에 선 기분이 어땠나.

▲긴장도 안하고 완전히 즐겼다. 정말 작은 역할이었지만 감사하게 생각하고 신나게 했다. 어떤 자리에서든 최선을 다해 공부하고 소화시키고 우러나오게 만들 수 있는 아티스트가 돼야 한다고 믿었다.

―메트 데뷔 전부터 스타였다. 1983년에는 미국을 대표하는 젊은 음악가로 선정되기도 했다.

▲그런 일이 있을 때마다 항상 '서프라이즈'였다. 기대를 안했기 때문이다. 스타가 되는 것이 꿈이 아니었다. 그저 주어진 일을 잘 해내는 것이 가장 중요한 문제였다. 다만 내가 가진 탤런트에 감사하고 모든 것에 감사했다.

홍혜경은 '체스 게임'을 경계했다. "여기로 가면 저걸 잡을 수 있고 이걸 하면 반짝 빛날 수 있다. 계산을 하는 거죠. 어떨 땐 성악가보다도 에이전트나 그의 어머니가 더 나서서 이래라 저래라 훈수를 둬요. 그런 부담을 아티스트에게 주는 건 건강하지 않아요. 나만의 보석을 최선을 다해 갈고 닦아서 사람들에게 보였을 때, 아름답다는 말을 듣는 것이 가장 행복한 일 아닐까요."

그러면서 홍혜경은 자신의 어머니에 대해 "딸이 무엇을 하든 항상 고맙게 생각하시는 어머니"라고 말했다.

"오히려 제 남편이 약간 극성이었어요. '당신이 이렇게 잘하는데 왜 저 무대에 다른 가수가 서 있냐'며 답답해 하기도 했어요. 그러면 저는 '여보, 세상에 노래 잘하는 사람이 나만 있는 것도 아니고 다 각자 자기 노래를 하는 거죠' 하면서 달랬어요. 너무 사랑해서 그런 거죠. 아내가 잘하는 게 정말 자랑스럽고 좋아서…."

홍혜경은 남편이 여전히 함께 있는 듯이 말했다. 남편은 지난 2008년 암으로 세상을 떠났다. 오페라 가수로서의 최대 위기였다. 그는 최고의 전성기를 달리고 있었다. 베르디의 '라 트라비아타'와 푸치니의 '라 보엠', 바그너 '뉘른베르크의 명가수'의 여주인공, 모차르트 '피가로의 결혼', 푸치니 '투란도트'까지 한 해에만 다섯 작품에서 활약했다. 그런 그가 노래를 그만 둘 생각을 했다. 2007년 10월 '피가로의 결혼' 이후 3년 가까이 메트에서 그의 무대를 볼 수 없었다. 그러나 메트 음악감독인 제임스 레바인이 끊임없이 그를 불러들였다. 음악 페스티벌의 마스터 클래스에서 학생들을 가르치면서 다시 입을 떼기 시작했고 음악으로 상처를 치유받았다. 결국 2010년 '라 트라비아타'의 비올레타로 메트에 돌아왔다.

[창간 15주년/대한민국 명장열전] (15) 뉴욕 '메트로폴리탄 오페라의 디바' 소프라노 홍혜경


―30년 넘게 메트의 '간판'이다. 자신의 매력이 무엇이라고 생각하나.

▲목소리가 제일 좋은 것도 아니고 제일 연기를 잘하는 것도 아니다. 노래할 때 관객들과 가장 소통을 잘하는 가수도 아니다. 대신 고루고루 갖추고 있는 사람이다. 매 작품 열심히 생각한다. 오페라 무대에 오를 때 내 연기만 하는 것이 아니라 주위를 둘러보며 그 안에서 내가 뭘 해야 하는지 파악한다. 여러가지를 신경써서 종합하는 것을 잘 하는 것 같다.

―제일 잘하는 게 없다니. 너무 겸손한 것 아닌가.

▲겸손한 게 아니라 사실이 그렇다. 크리스천이라서 더 그런 것 같다. 여러 번 말하지만 감사하는 마음이 커서 그렇다. 내가 가진 것은 하나님께서 주신 선물이다. 그걸 감사함으로 잘 활용하는 것이 크리스천의 삶이 돼야하기 때문이다.

철저한 자기관리와 신중한 작품 선택도 지금의 그를 만든 비결이다. 1982년 메트 오페라 콩쿠르에서 한국인 최초로 우승한 뒤 2년이 지난 뒤에야 데뷔 무대에 서게 된 것은 자신과 꼭 맞는 배역을 찾기 위해서였다. 그가 데뷔 초부터 지금까지 푸치니 '나비부인'의 동양인 여주인공 초초상 역을 거절해 온 것은 유명한 일화다.

―초초상을 하고 싶지 않았던 특별한 이유가 있나.

▲음색도 안 맞았지만 동양 여자 역할로 세상에 나오고 싶지 않았다. 초초상으로 시작하면 캐스팅 하는 사람들에게 편견이 생길 거라고 생각했다. 그래서 첫 역할은 일부러 더 극단적인 서양 여자 역할을 택했다. 금발에 파란 눈을 가진 아름다운 공주였다.

―작전이 통했나.

▲아시아 소프라노 중에서 바그너의 '라인의 황금'에서 프라이아 역할을 맡은 건 나 밖에 없을 것이다. 사과를 경작하는 젊음과 미의 여신이다. 그런 작품이 여럿 된다. 내가 내 길을 만든 것이다. 서양음악으로 서양무대에 서려면 서양사람으로 인정을 받아야 하지 않겠나.

―아시아 출신 소프라노에 대한 차별이 있었나.

▲당연하다. 지금도 유럽의 오페라 하우스에서는 동양 여성들에게 서양 여성 주인공 역할을 주는 경우가 많지 않다. 다만 나는 직접적인 차별을 겪진 않았다. 일단 노래를 잘하면 사랑받는다. 그게 나의 무기였다. 또 항상 자신감이 있었다. 누가 나에 대해 나쁘게 말하면 속으로 생각했다. '언젠가 진가를 보여주겠다.'

그렇게 거부하던 초초상을 내년 2월 메트에서 공연한다. 지금 안하면 영영 안 할 것 같았다. "나이가 들어 돌아서면 잊어버린다"며 속상해하면서도 "새로운 작품을 연습할 때가 가장 행복하다"고 했다.

―무대에 설 때가 아니라 연습할 때가 가장 행복한 순간이라니 의외다.

▲연주하는 시간은 평가받는 시간이다. 굉장히 힘들고 부담스러운 일이다. 그래도 무대에 올라가서 몰입하다 보면 좋다. 뭔가 보여주고 싶다. 무대 체질인지, 확실히 타고난 게 있는 것 같다.

최근에는 기쁨이 하나 더 늘었다. 학생들을 가르치는 일이다. "제가 학생이라도 저처럼 해외에서 많은 경험이 있는 사람이 가르쳐 준다면 정말 좋을 것 같아요."

―홍혜경을 꿈꾸는 어린 소프라노들이 많다.

▲자기 음성을 빨리 파악하는 게 가장 먼저라고 조언하고 싶다. 젊은 친구들이 유튜브에서 세계 정상급 성악가들의 영상을 보며 따라하는 경우가 많다. 테크닉을 제대로 터득하지 않고 무작정 따라하는 건 목소리를 망치는 지름길이다.

그는 "오랫동안 노래를 하기 위해서 지켜야 할 규칙이 있다"며 세 가지를 꼽았다. 확실한 발성, '성악'을 진지하게 받아들이는 마음, 똑똑함이다.

―'똑똑함'이란 머리가 좋아야 한다는 뜻인가.

▲한계가 어디인지를 아는 지혜다. 내가 가진 가치가 훼손되지 않는 범위를 알아차릴 수 있어야 한다. 스타가 되기 원하는 욕심이 오히려 가수로서의 생명을 단축시키게 된다. 메트 오페라에 데뷔한 뒤 비슷한 또래의 소프라노들이 소리소문 없이 사라지는 경우를 숱하게 봤다.


홍혜경은 앞으로 국내 무대와 학생들을 가르치는 일을 늘려갈 생각이다. 사실 국립오페라단이 예술감독 인선으로 몸살을 앓을 당시 홍혜경이 적임자로 지목됐고 문화체육관광부로부터 공식 제안을 받았지만 고사했다.
행정 경험이 없는데다가 단장직에 모든 것을 쏟을 수 있는 상황이 아니라는 이유였다.

"저는 오페라 가수잖아요. 그것도 세계 무대에서 오페라를 아주 많이 한 가수죠. 노래는 어떻게 하는 것이고 오페라는 무엇인지 한국 학생들에게 가르쳐주는 것이 한국 오페라의 발전을 위해 정말 중요하다고 생각해요. 비단 학생뿐만 아니라 한국 관객들, 대한민국 전체에 오페라의 진수를 알려드리고 싶어요." dalee@fnnews.com

이다해 기자

■ 소프라노 홍혜경 프로필

△만 56세 △예원학교 △미국 뉴욕 줄리아드 음악학교 △줄리아드 음악대학원 △1982년 미국 뉴욕 메트로폴리탄 콩쿠르 우승 △미국을 대표하는 4인의 젊은 성악가 선정 △오페라 '티토왕의 자비' 주역으로 메트 오페라 데뷔 △워싱턴 오페라 가이드 올해의 예술가상 △노만빈센트필어워드 수상 △제4회 대한민국오페라대상 이인선상 △제24회 호암상 예술상 △2014년~현재 연세대 성악과 석좌교수

fnSurvey